2011년에 학교 신학잡지인 '복음과 문화'에 기고했던 글의 서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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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가 제과점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한다.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계산을 마치자 점원이 상냥하게 말한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나오실 거세요.” 누가 나오신단 말인가? 커피, 아니, ‘커피님’이시다. ‘나오실 거예요’도 아니고, ‘나오실 거세요’란다.
한겨울에 세차장이 딸린 주유소에 들어가서 주유를 마친 후 혹시나 해서 물어본다. “오늘 세차 되나요?” 직원이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은 추워서 세차 하시면 차가 어세요.” 역시 여기에서도 차가, 아니 ‘차님’이 ‘어신다’.
본디 우리말은 사물이 주어인 문장의 서술어에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어가 사물인 문장의 서술어에 존칭이 붙기 시작하였고, 요즈음에는 이것이 본래 표준말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쓰이고 있다.
시계가 수중 20미터까지 방수가 ‘되시고’, 옷의 사이즈가 손님께는 조금 ‘크시고’, 영화표 가격이 제휴 카드 때문에 할인이 ‘되신다’. 어찌하여 이처럼 극심한 우리말 파괴가 일어나고 있을까?
오늘날,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호칭이 있다면 무엇일까? 예전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존칭어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으나, 요즈음은 거의 모든 직업의 뒤에 ‘선생님’을 붙인다(굳이 구분하자면, 많은 직업의 뒤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넣어 부르고, 막연한 존칭어는 ‘선생님’에서 ‘사장님’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1970년대에만 해도 아이들은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도록 은연중에 교육을 받아왔지만, 오늘날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어디에서나 대접을 받고 힘을 발휘하게 되는 권력을 소유한 신분이 있을까?
있다. 답은 ‘고객님’이다. ‘고객님’이라는 칭호를 듣는 순간, 누구나가 절대왕정 시대의 임금처럼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되고, 상대를 ‘고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마치 신하가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인다.
사물들이 존칭을 받게 되는 문장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문장의 앞에 반드시 (때로는 생략된 채로) ‘고객님’이라는 칭호가 붙어있고, 문장의 주어인 사물은 ‘상품’이라는 점이다.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구호가 바야흐로 현실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경제체제 안에서도 자본 세력들 사이의 무한 경쟁을 용인할 뿐 아니라, 심지어 조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나라들 안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미국에서 촉발되어 거의 모든 나라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있는 ‘소비-자본주의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자본주의 문화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대접받는’ 문화였으나, 소비-자본주의 문화는 ‘그 돈을 나에게 지출하는 사람을 대접하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일례로, 백화점에서 고액의 상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순간은 대접을 받지만, 그 상품을 살 의향이 없어 보이거나, 그러한 지출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순간, 점원의 시선은 싸늘하게 변하고 ‘물어볼 것만 얼른 물어보고 빨리 매장에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신분은 급강하하게 된다. 더 이상 ‘고객님’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취급하는 물건을 구매할 레벨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판명되는 순간, ‘고객님’으로 포장되었던 모든 신분은 박탈당하게 된다.
‘소비-자본주의 문화’로 인해 생겨난 우리말의 파괴는 위의 예들에 그치지 않는다. ‘명품남’, ‘명품녀’에 이어, ‘품절남’, ‘반품남’ 따위의 신조어들이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대체 언제부터 인간을 짐승에 비유하는 말이 칭찬이었나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짐승돌’ 같은 단어는 차라리 예외로 하는 것이 덜 비참하리라).
이러한 용어가 자신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하는 당사자들은 이 말들이 본래 ‘상품’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까.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은 문화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위의 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급격한 언어의 변화를 동반하며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소비-자본주의 문화는 어떠한 문화인가? 신학적으로 성찰해 보았을 때, 그리스도교 정신과 얼마나 융화할 수 있는 문화인가?
H.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1951년에 신학과 문화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한 이래, 문화는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는 현대 신학의 과제를, ‘상관성(correlation)’의 방법으로 인간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대화를 수립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신학의 과업이 문화적 분석에 의해 드러난 인간 욕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해석하는 것이라 보았다.
제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니버의 분석을 영성의 분야에 적용하여,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문화가 신학과 영성의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게 된 데에는, 문화가 ‘제2의 자연’으로서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를 매개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러 종교의 신비체험들도, 같은 체험을 신비가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사회-종교적 구조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는 일부 종교학자들의 파격적인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N. 막스 윌디어스(N. Max Wildiers)가 옳게 분석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신학이 그 배경이 되는 특정한 문화와 세계관과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되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에, 신학의 뿌리요 근본 목표인 신앙 역시 문화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신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인 절대자와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어떠한 하느님상(하느님像, 하느님의 이미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하느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여긴다면 하느님과 ‘부모-자녀’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하느님과 우정을 맺을 것이다. 하느님을 폭군이라고 믿는다면, 하느님과 노예처럼 굴종적인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신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특정한 문화는 특정한 하느님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상은 개인적 체험에서도 영향을 받지만, 특정한 문화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회적 체험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문화와 긴밀한 영향을 갖고 있다 하겠다.
다양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특정한 문화가 다양한 종류의 문화들보다 두드러지게 우세하다고 쉽게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자국의 경제 상품 뿐 아니라 문화까지 반강제적으로 수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우리 시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David Tracy, Richard A. Horsely, Lee Cormie, Mary Jo Leddy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 Marcus J. Borg와 John Dominic Crossan 같은 미국 신학자들조차 자신의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제국이란 군사력과 경제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임의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지배체제이다. 이런 정의에서 볼 때 미국은 우리가 국가로서 정력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외교정책과 경제적 세계화에 있어서 모두 우리 시대의 로마제국이다” -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하는 돈의 문화(culture of money)와, 물신(物神) 숭배가 자본주의와 결합한 물질주의-자본주의 문화(culture of materialism capitalism)의 근원지를 막연히 서구라고 표현한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 문화(culture of consumer-capitalism)의 근원지는, 앞서 언급한 두 문화를 전파하는데 충실한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이다.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은 역사 안에 출현한 악을 편견(bias)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네 가지의 편견, 곧 개인적(individual) 편견, 집단적(group) 편견, 일반적(general) 편견, 극적(dramatic) 편견을 제시한다. 편견이란, 우리가 올바른 인식을 하는데 실패하는데서 비롯한 것으로써, 이들 중 일반적 편견은 상식(common sense)이 항상 옳다는 환상에 사로잡힘으로써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 편견은 그 보급력과 깊이, 교활함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더욱 긴 사이클의 쇠퇴(decline of longer cycle)를 발생시킨다. 특별히, 문제성 있는 문화를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일반적 편견은 문화적 수준의 악으로 작용하며, 이는 다른 어떤 형태의 악보다도 더 긴 기간 동안 인류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비-자본주의가 양산해내는 일반적 편견은 어떠한가? 그것은 한마디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하며, 그 돈 역시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나 투자, 혹은 기타의 방법으로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안에서 우리는 혹시, 하느님의 은총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보다도 ‘은총도 공짜가 아니다’라는 그릇된 편견을 더욱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자기양여(自己讓與, Selbstmitteilung Gottes)로서의 은총보다, 우리가 기도나 선행이라는 자본을 지불하고 은총이라는 상품을 구매한다는 식의 소비-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은총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내가 기도하고 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은총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마치 애프터서비스(AS) 센터나 소비자 고발센터에 가서 따지듯 하느님께 따지고 있지는 아니한가?
이 글은 소비-자본주의 문화의 영향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떠한 지 고찰한 후, 이 문화가 제공하는 일반적 편견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다루려 한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상에 깊이 의존해 있으므로, 소비-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형성된 하느님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
특별히, 오늘날의 성탄 축제에 초점을 두려 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의 성탄 축제가 진정한 하느님상과 왜곡된 하느님상의 극명한 대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신 신비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문화는 성탄절에, 물질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신적 존재를 믿고 기다리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1장에서는 우선, 미국에서 개발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간 오늘날의 성탄 축제의 문제점을 성찰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성탄 축제가 하느님의 육화의 신비에 뿌리박은 진정한 영성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온전한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신 성탄에, 소비-자본주의 문화는 마치 하느님이라는 선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듯,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더 구매하고 더 소비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본주의 문화는 이러한 성탄의 소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비스런 우상을 창조해 내었는데, 바로 미국 판 산타클로스이다. 이 미국 판 산타클로스가 물질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왜곡된 하느님상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1장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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