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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s/2017 익산, 전주,변산반도

1500년 전의 기록. - 금제사리봉안기(익산 미륵사지석탑)

​익산 미륵사지석탑 안에서 금제사리봉안기(아래 사진)가 발견되었다.


미륵사지 서탑(서쪽의 석탑)을 해체하던 중 2009 1월에 심초석(心礎石. 탑의 중앙 기둥을 받치는 돌) 안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병[3]과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금판에 음각하여 주칠(朱柒. 붉은 칠)한 유물로, 미륵사 창건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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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根機(근기)에 따라 感應(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舍利(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五色으로 빛나는 舍利7번 요잡[4]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선근)資糧(자량)으로 하여 大王陛下(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王后(왕후)身心(신심)水鏡(수경)과 같아서 法界(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不滅(불멸)하시어 七世久遠(구원)까지도 함께 福利(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 김상현 동국대학교 교수]

-------------------------------- 내용 끝 -----------------------------------------

이 유물로 인해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시대인 己亥年(기해년:638)에 창건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왕흥사와 달리 이 쪽은 무왕의 재위와 일치한다. 게다가 법왕의 재위기간이 599년부터 600년이기 때문에 무왕이 대략 35년 이상 공사를 해서 638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말이 된다!  삼국유사에 있는 부여 왕흥사와 얽힌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익산 미륵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익산 미륵사에 얽힌 기록이 문제가 된다. 일단 창건은 무왕이 한 것은 확실하지만 공사의 시작은 법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물론 법왕의 재위가 워낙 짧았기에 사실상 무왕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크니 큰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왕후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의 요청에 의한 것인데, 사리함 유물에 의하면 이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씨가 된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8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정도 대형 사찰을 지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뒤따라야 하니. 결국 왕후는 백제의 인물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설화와는 맞지 않아 '서동 설화''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새로운 미스테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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